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(문단 편집) === 정치 입문 === 2년간의 여행으로 건강과 자신감을 얻은 솔즈베리는 1853년 스탬퍼드 지역의 하원의원직을 제안받는다. 성직자의 길과 정치가의 길 중 무엇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고심 끝에 의원직을 맡아 [[보수당(영국)|보수당]]의 일원이 된다. 당시 수상이었던 [[존 러셀]] 경[* 유명한 수학자 겸 철학자 [[버트런드 러셀]]의 할아버지이다.]의 평화주의 정책을 "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다"며 비판하고 나서, 솔즈베리는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1866년 36세의 나이에 [[인도]] 국무상에 오르게 된다. 1년 후 아버지인 2대 솔즈베리 후작이 사망하자 후작위를 계승해[* 큰형이 후손 없이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.] 상원의원에 임명되며 직책을 그레이 백작에게 넘겼지만, [[벤저민 디즈레일리]] 내각에서 유능함을 입증하는 데 성공해 1874년 다시 인도 국무상 자리에 복귀한다.[* 사실 이때 솔즈베리는 디즈레일리를 개인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.] 4년간 인도의 정책들을 담당하며 그는 디즈레일리와 신뢰관계를 쌓았고, 솔즈베리의 능력을 높이 본 디즈레일리는 1878년 그를 외무장관에 임명한다. 당시 발칸 반도는 전쟁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고, 전임 외무장관이었던 더비 백작은 무능한 정책결정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다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. [[콘스탄티노플]]의 주도권에 대한 영국-러시아 양국의 첨예한 대립은 점점 위기로 고조되어 갔으며, 당연히 [[오스만 투르크]]와의 문제까지 추가되며 상황은 노답 일로를 걷고 있었다. [[러시아-투르크 전쟁]]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며 오스만과 [[산 스테파노 조약]]을 맺으며 영국은 더욱 불리한 상황이기도 했다. 이때 솔즈베리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러시아를 [[베를린 회의]]에 참여하게 한다. 물론 판은 [[오토 폰 비스마르크|비스마르크]]가 다 깔아 놓은 거지만 그 이후는 [[베를린 회의]] 문서 참고. 덕분에 영국은 러시아와의 동유럽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